천재 예술가의 패션 하우스, 생로랑(Saint Laurent)

기사입력 : 2019-10-08 00:45:09 차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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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부터인가 면세점에서 가장 긴 줄을 자랑하는 곳은 입생로랑 뷰티 매장이 되었습니다. 2018년 입생로랑은 우리나라 모든 면세점을 통틀어 5번째로 매출이 높은 브랜드였죠. 지금은 입생로랑이 화장품으로 더 유명하지만, 사실 입생로랑은 화장품이 아니라 패션에서 시작된 브랜드입니다.

입생로랑의 창업주 이브 생 로랑은 세계에서 가장 위대한 디자이너 중 하나입니다. 1983년 생존하는 디자이너로는 세계 최초로 뉴욕 메트로폴리탄 아트 뮤지엄에서 25년 회고전을 가졌고, 그를 기리는 박물관까지 있을 정도이죠.
 

▲사진 = 입생로랑 모로코 마라케시 박물관. 입생로랑 박물관은 파리와 마라케시에 있어요. ©Dan Glasser




이브 생로랑이 브랜드를 론칭하기까지


▲사진 = 이브 생로랑 ©Pierre Olivier Deschamps / Agence VU

이브 생로랑은 천재입니다. 무려 21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실력만으로 프랑스 국보급 브랜드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죠. 하지만 우울증,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등으로 점철되었던 그의 삶은 행복하지만은 않았을 겁니다. 아슬아슬하고 위태로웠죠. 고흐, 이상 같은 천재 예술가들의 인생처럼 말이에요.

그는 프랑스인이지만,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던 아프리카 알제리에서 1936년에 태어났습니다. 어릴 때부터 두 여동생 그리고 어머니와 패션 잡지를 보고 인형놀이 등을 즐겼던 그는 유년 시절에 호모라며 괴롭힘을 당했죠. 그의 우울증은 아마 그때부터 시작되지 않았을까 합니다.

▲사진 = 이브 생로랑의 어린 시절. 그의 본명은 이브 앙리 도나 마티유생로랑(Yves Henri Donat Mathieu-Saint-Laurent)이에요.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그의 어머니는 그런 그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았죠. 이브 생로랑이 여성 옷들을 스케치한 걸 눈여겨보고는, 프랑스 패션 매거진 보그 편집장 미셸 브뤼노프(Michel Brunhoff)에게 그를 데려가 그의 스케치를 보여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이브 생로랑에게는 새로운 세계가 열렸어요. 편집장의 눈에도 그는 천재였거든요. 브뤼노프의 권유에 따라 그는 파리에서 패션 디자인을 공부했고, 세계적인 대회에서 칼 라거펠트를 제치고 1위를 했습니다. 그러고 나서 브뤼노프에게 다시 찾아가 자신의 스케치를 한번 더 보여줬죠.

브뤼노프는 또 한 번 놀랐습니다. 그의 스케치가 크리스찬 디올이 그 날 아침 브뤼노프에게 비공개로 보여줬던 스케치와 똑같았거든요. 당시 크리스찬 디올은 프랑스에서 국보급 패션 하우스였습니다. 프랑스 패션 매출의 절반 이상이 크리스찬 디올에서 나왔죠. 브뤼노프는 당장 이브 생로랑을 크리스찬 디올에게 데려갔고, 디올은 그 자리에서 이브 생 로랑을 채용했습니다.

▲사진 = 크리스찬 디올(좌)과 이브 생로랑(우). 1955년 18세의 나이로 그는 디올과 함께 일하게 됐습니다.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이브 생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을 진심으로 존경했고, 크리스찬 디올도 이브 생로랑을 많이 아꼈다고 해요. 그렇게 디올과 일한 지 채 3년이 되지 않은 1957년 어느 날, 디올은 급작스럽게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이브 생로랑이 디올의 수석 디자이너가 됐어요. 불과 21살에 말이죠.

1958년 1월 이브 생로랑은 크리스찬 디올을 위한 첫 컬렉션을 선보였는데 이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쇼가 끝나자 파리 시민들이 '이브 생로랑이 프랑스를 구했다!'며 그의 이름을 연호할 정도였어요.

▲사진 = 이브 생로랑이 당시 선보였던 트라페즈(Trapeze) 라인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그는 점차 디올의 주 고객층인 상류층 귀부인이 좋아하지 않을 만한 파격적인 옷들을 선보이기 시작했습니다. 절정은 1960년 F/W 컬렉션이었죠. 거리의 청년들에서 영감을 받아 가죽 재킷을 선보였는데 이 컬렉션은 완전히 실패였습니다.

 

▲사진 = 1960년 F/W 비트닉(beatnik) 컬렉션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이렇게 되자 크리스찬 디올의 수장이었던 마르셀 부삭은 그를 교체하고 싶어 졌어요. 마침 알제리 독립전쟁이 있었고, 알제리 태생의 이브 생 로랑은 징병되어 군입대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마르셀 부삭은 이브 생로랑이 군대에 있는 동안 계약 기간이 남아있음에도 그를 해고했죠.

섬세하고 병약했던 이브 생로랑은 군생활 3주 만에 신경쇠약으로 정신병원에 입원해 있었는데, 거기서 무단 해고 소식까지 들었으니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이 위기를 기회로 바꿨는데요. 사랑의 힘 덕분이었습니다. 그의 영원한 동반자이자 연인이었던 피에르 베르제(Pierre Berge)가 그를 대신해 디올에 소송해 48,000 파운드를 받아냈고, 후원자까지 데려온 겁니다. "당신은 천재니까 나머지는 내가 알아서 할게"라고 하면서 말이죠. 

 

▲사진 = 이브 생로랑(좌)과 피에르 베르제(우)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패션 하우스 생로랑은 그렇게 세상에 처음 태어났습니다. 세기의 연인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에 의해 말이에요(원래 1961년 최초 출범했을 때의 브랜드명은 입생로랑이었지만, 2013년부터 이름이 생로랑으로 변경되었습니다).


파리 패션계를 제패한 패션 하우스, 생로랑

이브 생로랑은 수많은 혁신을 하면서 패션을 예술의 경지로 끌어올렸습니다.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그는 세계에서 가장 핫한 디자이너였죠. 세기의 디자이너 샤넬이 자신의 정신적 후계자로 이브 생로랑을 꼽기도 했을 만큼이요.

생로랑은 '우아함(elegance)'이 아닌 '매력(appeal)'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전통적인 여성미를 강조하는 옷이 아닌, 편안하면서도 여성들을 당당하게 해 주는 옷을 만들었거든요.

이브 생로랑이 세계 최초로 선보여 대중화시킨 여성복은 셀 수 없이 많습니다. 피코트, 트렌치코트, 사파리 재킷, 점프슈트, 시스루 드레스…. 그의 천재성은 남성복을 단순히 여성복으로 바꾸기만 한 게 아니라, 여성 특유의 아름다움을 살려낸 데에서 빛났죠.

이를테면 1968년 아프리카 작업복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었던 사하린느(Saharienne, 사하라 사막의 여인이라는 뜻)를 보면, 사파리 재킷을 허벅지까지 올라오는 부츠와 함께 스타일링함으로써 섹시한 매력이 배가됩니다. 지금 봐도 전혀 촌스럽지 않아요.

▲사진 = 사파리 재킷을 입은 모델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는 이브 생로랑 ©Le Parisien


그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바로 1966년 선보인 여성 턱시도 '르 스모킹(Le Smoking)'입니다. 당시에는 공공장소나 격식 있는 자리에서 여성들이 바지를 입는 게 예의에 어긋난다고 여겨졌는데, 생로랑의 르 스모킹을 계기로 그런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어요.


▲사진 = 생로랑의 르 스모킹. 남성 턱시도에서 차용한 디자인이지만 관능적이에요.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또한 생로랑은 예술을 패션으로 끌어온 세계 최초의 패션 브랜드이기도 합니다. 몬드리안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아 1965년 출시한 몬드리안 드레스를 시작으로, 달리, 피카소, 브라크, 반 고흐 등 예술 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컬렉션을 수없이 선보였죠.

특히 그의 몬드리안 드레스는 몬드리안 룩(Mondrian look)이라는 단어를 패션 사전에 등재시킬 정도로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어요. 현재까지도 몬드리안 룩을 활용한 상품이 나올 정도랍니다.

▲사진 = 생로랑 1965년 A/W 컬렉션의 몬드리안 드레스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사실 예술을 끌어오지 않았다 해도, 이브 생로랑의 컬렉션 하나하나를 예술이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요. 기존 관습을 깨고, 패션을 새로운 관점에서 계속해서 재정의했거든요.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을 억압하는 브래지어를 태워버리자는 목소리를 내던 1968년, 생로랑에서는 브래지어 없이 가슴을 훤히 드러내는 시스루 드레스를 세계 최초로 만들어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도 했고요. 오뜨꾸뛰르 컬렉션에서 흑인 모델을 세계 최초로 세우기도 했어요.

여기서 오뜨꾸뛰르(Haute Couture)란 상류층을 타깃으로 하는 예술적인 옷인데요. 이에 대비되는 개념은 기성복인 레디투웨어(Ready-To-Wear), 혹은 프레타포르테(Pret-a-Porter)죠.

생로랑은 오뜨꾸뛰르 패션 하우스로는 최초로 레디투웨어 라인을 출시한 브랜드이기도 해요. "백만장자들을 위한 옷을 디자인하는 데 지쳤다"라고 말하면서, 1966년 생로랑 리브고쉬(Yves Saint Laurent Rive Gauche)라는 기성복 라인을 선보였어요.

▲사진 = 생로랑 리브고쉬 매장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이러한 수많은 독창적이고 실험적인 시도들로 생로랑은 패션계에 연일 화제를 일으켰죠. 이브 생로랑이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중 한 명으로 자리 잡았음은 물론이고요.


천재 예술가 이브 생로랑의 삶

하지만 1990년대 들어오면서 패션 환경은 완전히 바뀌어버렸죠. 파리 패션계의 암흑기였다고나 할까요. 파리의 오뜨꾸뛰르 패션 하우스들은 차례차례 위기를 맞았고, 생로랑도 예외는 아니었어요.

생로랑은 1989년에 성공적으로 주식시장에 상장까지 했지만, 빚에 허덕이다 1993년에는 지분 57%를 프랑스 제약회사 사노피(Sanofi)에 넘기게 됐죠. 사노피는 5년 후 생로랑을 케어링(Kering) 그룹에 재매각했고요.

그 과정에서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는 생로랑 패션의 오뜨꾸뛰르 라인만 총괄하도록 역할이 축소됐죠. 생로랑 패션의 리브고쉬 라인과 입생로랑 뷰티는 도미니코 드 솔레(Domenico de Sole)와 톰 포드(Tom Ford)가 이끌게 됐고요.

▲사진 = 톰 포드(좌)와 도미니코 드 솔레(우). 둘은 적자의 늪에서 시달리던 구찌를 화려하게 부활시킨 주인공이죠. ©Alchetron

이브 생로랑은 아마 자존심이 무척 상했을 거예요. '프랑스 패션의 정수나 다름없는 생로랑이, 상업적인 미국 디자이너 손에 맡겨졌다니'라고 생각하면서 말이죠. 실제로 톰 포드는 가장 존경하는 디자이너로 이브 생로랑을 꼽았지만, 이브 생로랑은 톰 포드의 생로랑 데뷔 컬렉션에도 참가하지 않았다고 해요.

톰 포드는 이브 생로랑처럼 세계적인 디자이너였지만 그와는 결이 달랐어요. 이브 생로랑이 내성적인 천재 예술가 스타일이었다면, 톰 포드는 천재인 동시에 마케터 기질이 다분한 소위 '인싸'였달까요. 이브 생로랑 눈에 톰 포드와 그가 이끄는 생로랑은 돈에 미친, 영혼 없는 패션 디자인처럼 보였을 거예요.

결국 이브 생로랑은 2002년 1월 마지막 패션쇼를 끝으로 패션계에서 은퇴했고, 2008년 7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죠. 이브 생로랑이 영면에 들기 며칠 전 피에르 베르제와는 공식적인 부부가 되었고요.

▲사진 = 마지막 패션쇼에서의 이브 생로랑의 모습 ©이브 생로랑 파리 박물관

피에르 베르제는 이브 생로랑이 세상을 떠난 뒤 이브 생로랑과 함께 수집한 미술품을 경매에 내놓았는데, 그들이 수집한 미술품들은 무려 6천억 원에 낙찰되었어요. 단일 경매 사상 최고의 낙찰액이었죠. 수익금 전액은 에이즈 재단에 기부되었고요.

왜 둘은 그렇게 많은 예술작품을 사모았을까요. 이브 생로랑은 '패션은 예술이 아니다'라고 겸손하게 말하곤 했다지만, 적어도 '이브 생로랑의 패션은' 예술이지 않았나 싶어요. 끝없는 실험정신, 깊이있는 열정, 그리고 감탄을 자아내는 아름다운 결과물들.

혹여나 모로코에 여행을 가시게 된다면, 마라케시에 꼭 들러보세요. 이브 생로랑이 자신의 영원한 영감의 원천이라고 했던 곳이 바로 모로코와 마라케시거든요. 여행을 즐기지 않던 이브 생로랑이었지만, 마라케시에 만큼은 매년 여름과 겨울 2주씩 머물렀다고 하죠.

▲사진 = 1977년 마라케시에 머무르던 피에르 베르제(좌)와 이브 생로랑(우) ©The Times UK

특히 마라케시의 마조렐 정원(Jardin Majorelle)에서는, '모로코의 색을 통해 색이라는 것이 내게로 왔다'라고 말한 이브 생로랑의 이야기에 완벽히 공감할 수 있을 거예요. 또렷하고 아름다운 색상의 건물들과 전 세계에서 온 이국적인 식물들이 어우러진 마조렐 정원은 마치 예술 작품을 현실로 옮겨놓은 것만 같죠.

▲사진 = 마조렐 정원 ©위키피디아

마조렐 정원은 프랑스 화가 자크 마조렐(Jacques Majorelle)이 1919년 마라케시의 구시가지에 만든 정원인데, 마조렐 사후에 폐허가 될 위기에 놓였던 이 곳을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가 매입해 본래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도록 했어요. 예술을 사랑하는 이브 생로랑과 피에르 베르제다운 선택이었죠.

이브 생로랑이 영원히 잠든 곳이기도 한 이 마조렐 정원에서, 이브 생로랑의 발자취를 한번 느껴보시면 어떨까요.

▲사진 = 마조렐 정원 ©론리플래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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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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