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거래위원회(이하 공정위)가 백화점 등 5개 업종에서 사용됐던 표준거래계약서를 복합쇼핑몰과 아울렛, 면세점 분야까지 확대 제정했다고 14일 밝혔다. 정부가 추진하는 다양한 정책변화의 일종으로 풀이된다. 과거 규모가 작아 사각지대에 놓였던 유통업종에도 표준거래계약서를 최초 마련하면서 앞으로 더욱 체계적이고 공정한 시장거래가 형성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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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공정거래위원회 표준계약서 주요 내용(2020.01.14) |
그동안 납품업체는 유통업체에 있어 철저한 ‘을’의 입장이었다. 대규모유통업자를 통해 제품을 판매하면 안정적으로 매출 판로를 확보할 수 있고, 제품 이미지 제고에도 도움이 되기 때문에 부당한 거래에도 수긍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주목할 점은 이번 표준계약서의 도입으로 계약전 사전 상호 소통을 통해 계약을 정하도록 규정하면서 업계에서 관행적으로 이루어졌던 불공정 행위가 상당히 줄어들 것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이번에 적용되는 표준계약서의 핵심적인 내용은 세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계약과 관련된 상세 내용을 정비했다. 과거 납품업자는 유통업자가 일방적으로 갱신 거부를 통보해도 법적인 보호를 받기 어려웠다. 이에 공정위는 표준거래계약서를 통해 납품업자가 자신이 계약 갱신 대상인지 문의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유통업자는 납품업자가 계약 갱신 대상인지 여부를 14일 이내에 서면으로 통지해야 한다.
만약 계약 갱신을 거절하거나 거래조건을 변경하고자 한다면 유통업체는 기간 만료 60일 전까지 통보해야 한다. 기한 내 통보하지 않으면 기존과 동일한 조건으로 계약이 자동 갱신된다. 납품업자 입장에서 계약 갱신 거절 사유가 부당하다고 판단되면 유통업체에 이의를 신청할 수 있는 절차를 마련해 납품업자의 권리를 크게 강화했다.
특히 유통업자가 ‘MD’(Merchandiser) 등을 개편하면서 납품업자에 계약갱신 거부를 통보하는 경우 납품업자 입장에서는 거절 사유를 정확히 알 수 없어 다른 유통업자와의 계약에서도 어려움을 겪었다. 이를 방지하기 위해 공정위는 계약 갱신, 판촉사원 파견 등 주요 거래 조건을 결정·변경하는 경우 그 기준과 절차를 계약 체결 시 납품업자에 통지하도록 규정했다.
또 불공정한 계약해지를 방지하기 위해 유통업자와 납품업자간의 계약해지 사유를 명확히 하고 유예기간을 부여했다. 그동안 유통업자는 납품기간을 지키지 못하거나, 물품의 품질이 낮은 경우 등 중요사항을 위반한 납품업자에게 계약해지를 요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납품업자가 어음·수표의 지급 거절, 파산절차 개시, 주요 거래품목 생산을 중단한 경우 등에만 제한적으로 계약해지가 가능하다.
만일 유통업자가 계약해지를 원할 시 최소 30일 이상의 유예 기간을 가지고 납품업자에 서면을 통해 시정을 요구해야 한다. 그럼에도 납품업자가 불응할 때에만 계약을 해지할 수 있다. 그동안 유통업자가 납품업자와의 관계에서 우월적인 지위를 이용해 암암리에 행해왔던 일방적인 계약해지가 사실상 불가능해진 것이다.
두 번째로는 매장 운영에 대한 상세 내용도 규정해 매장임차인의 권리가 대폭 강화됐다. 앞으로 매장의 바닥, 조명, 벽체 등의 기본적인 인테리어 공사비용은 유통업자가 부담한다. 또 유통업체의 필요나 요구로 매장임차인이 인테리어를 시공해야 할 경우에도 비용은 유통업체에서 지불해야 한다.
특히 유통업자가 매장 위치를 변경하고자 하는 경우 그 기준에 대해 납품업자에게 사전에 공지해야 하고, 계약을 체결했다 하더라도 별도의 서면으로 매장임차인에 통지해야 한다. 유통업자 MD 등이 갑작스럽게 매장 이동을 요구해 매장 운영 계획에 차질이 생겼던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이에 따라 매장 이동 기준을 통보받은 납품업자는 자신의 매장이 이동대상에 해당하는지 확인을 요청할 수 있게 됐다.
또 판매 촉진 행사 시 필요한 사항에 대해서는 상호 사전에 서면으로 합의하고 납품업체가 지불하는 전체 판촉비용이 100분의 50을 초과하게 되면 그 초과분은 유통 업체가 부담해야 한다. 특히 그간 유통업체가 관리했던 판촉사원의 업무에 대해서도 지시·명령하거나 근무 시간·업무 등에 대해 관여할 수 없도록 규정해 납품업체가 독립적으로 매장을 운영할 수 있도록 했다. 납품업체가 자발적으로 파견한 경우에도 인건비 비용을 유통업자와 분담한다.
마지막으로 유통업체와 납품업체간의 비용 분담 기준을 더욱 명확히 했다. 공정위는 유통업체가 납품업체에게 시장가격보다 현저히 낮은 가격으로 납품하게 하도록 하거나 혹은 경영정보를 제공하도록 하는 등 기타 6가지에 대한 불공정행위를 모두 금지했다. 특히 납품단가가 부당하게 인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유통업자가 유통벤더 등 제3자를 거래 중간에 끼워넣는 행위도 금지해 통행세 관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게 됐다.
납품받은 후의 상품의 멸실 책임은 유통업자에게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통업자는 유통관계에서 유리한 입지를 이용해 납품업자가 멸실 비용을 책임지도록 했다. 하지만 공정위가 표준거래계약서를 통해 납품업자가 납품한 상품이 파손되거나 훼손되면 그 책임을 유통업자도 부담하게 함으로써 책임 관계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했다.
직매입도 상품 가격을 인하한 부분은 유통업자가 부담해야 하지만 유통업자는 항상 일정한 이익률(30~40%)을 확보하고 모든 비용을 납품업자에 전가했다. 이에 공정위는 유통업체가 매월 일정한 이익률 확보를 위해 필요한 금액을 계산하고, 해당 금액만큼 납품금액 가격 인하를 요구하는 행위를 금지해 불공정했던 비용부담 기준을 정리했다.
면세점 대상으로는 표준거래계약서에 ‘대금지급’ 및 ‘반품’ 조건을 따로 분리해 명확하게 규정했다. 면세점 업체가 상품 납품업체에게 직매입한 면세품의 납품대금은 상품 입고일로부터 60일 이내에 반드시 지급해야 한다.
대금을 지연 지급할 경우 공정위 고시에 따라 지연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특약매입’ 혹은 ‘임대을’(임대료 외에 추가로 판매금액에 따른 수수료를 제공)의 경우는 판매 마감일로부터 40일 이내에 지급해야 한다.
특히 관세가 면제된 면세품의 경우 국내로 유통되면 시장 교란을 일으킬 수 있어 재고처리가 까다롭다. 때문에 면세점은 직매입한 물건 중 팔지 못하고 남은 재고는 할인행사와 끼워팔기 등을 통해 판매하고 남은 면세품은 멸각한다. 재고가 남게 되면 면세점은 상당한 손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다. 이에 일부 면세점이 납품업체가 ‘자발적’으로 반품에 나섰다고 주장하며 직매입한 면세품의 반품을 요구했다. 한 면세점 관계자는 “자발적으로 납품업체가 반품에 나선 것”이라며 “이는 업계의 관행도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공정위는 앞으로 납품업체의 자발적인 요청이 있더라도 다른 유통채널로 판매하기 어렵다고 판단되는 등 사회 통념상 그 자발성을 믿기 어려운 경우에는 반품을 원칙적으로 금지한다고 밝혔다. 따라서 업계에서 관행적으로 여겨졌던 면세품 반품도 사실상 금지될 예정이다. ‘울며 겨자먹기’로 면세점이 책임져야 할 재고문제를 대신 떠안았던 납품업체의 부담도 한결 덜어질 것으로 보인다.
공정위는 “향후 사업자들이 표준계약서를 적극 채택하도록 유도·지원하고 계약조항 준수 여부에 대해서도 면밀히 모니터링해 나갈 것이다”라며 “아울러 공정거래협약 평가시 표준계약서 채택 여부에 대해 인센티브를 부여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향후 면세점 외 2개 업종 표준거래계약서 내용이 개별 계약에 반영되면 공정거래 관행이 정착되고 납품업자 및 매장임차인의 권익 보호에 상당한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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