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체험기] DAY 7 : 제주와 닮은 남편에게 보내는 찬사

기사입력 : 2021-10-04 12:27:44 최종수정 : 2021-10-05 14: 13 차민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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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L과 나는 서로 다른 점들 투성이지만 거의 딱 하나 같은 게 있다. 그건 바로 각자의 연인을 끔찍하게 사랑한다는 것. 눈치 보지 않고 서로의 연인에 대한 이야기꽃을 피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런 의미에서 L과의 여행은 현재 멀리 떨어져 지내고 있는 남편에 대해 다시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2.

남편과 이야기하고 있으면, 남편 생각을 하고 있으면, 아직도 나를 둘러싼 주변의 기온이 1-2도 높아지는 것만 같은 느낌이다. 기분 좋은 따뜻함이 몽글몽글 피어난다.

현재 우리 남편은 주위에서 인정받는 능력 있는 사회인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남편의 첫 이미지는 사람 좋은 백수 한량에 가까웠다. 이렇게 어엿한 사회인이 될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사진=Unslash / 세상 평화로운 이 고먐미처럼 말이다


#3.


나는 서울대 경제학부를 졸업했다. 나를 포함한 대학 동기나 선후배들에게서 빈번하게 나타나는 특징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압박감이었다. 서울대를 가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던 습관이 좋은 직업을 갖기 위해, 좋은 학점을 얻기 위해 노력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전이되었달까.

이런 환경에서 만났던 남편은 서울대의 별종 같았다. 난 아직도 기억한다. 집권당을 뜻하는 단어가 여당인지 야당인지 헷갈려하는 남편에게 받았던 충격을. 남편은 크게 부끄러워하지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현재는 정치 시사 프로그램을 즐겨보는 아재가 되었다.)

처음 함께 유럽여행을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어릴 때부터 유럽여행을 자주 다녔음에도 “기왕 왔으니 여기, 여기, 여기는 가봐야 한다”는 묘한 압박감이 있었다. 유럽여행이 생전 처음이었던 남편은 정반대였다. “별로 안 끌리는 곳은 안 가도 된다”는 것이었다. 그 안 끌리는 곳에는 파리의 에펠탑 같은 한국인이라면 응당 인증샷을 남겨야 하는 곳들도 포함되어 있었다.

#4.

남편에게 반드시 해야 하는 것, 알아야 하는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옳다 그르다에 대한 판단도 잘 하지 않았다. 내가 좋으면 그만이었다. 이러한 남편의 태도가 나에겐 너무 신선했고 해방감까지 느껴졌다. 남편의 “안 봐도 돼”라는 한 마디에, 이제서야 진짜 여행을 하는구나 싶어졌다.
 

▲ 사진=차민경 기자 / 그 이후 우린 느릿느릿하고 여유로운 여행을 한다 (2018년 발리)


일상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남편과 함께 있으며 나는 좋아하는 것을 위해 좋아 보이는 것을 버릴 줄 알게 되었다. 이를테면 나는 대기업이라는 안정적이고 번듯한 직장을 버림으로써 내가 평생 갈망해온 자유로움을 얻었다. 불안정하고 백수 같이 보이지만 자유로운 인생. 비로소 내게 꼭 맞는 삶을 찾은 것 같았다.

#5.

여기에 다년간의 드라마와 예능 시청으로 함양한 남편의 무해한 유머와 위트는 합리와 효율성이 지배하는 비쩍 마른 사막같이 건조한 내 세상을 생명수로 적셔주는 기분이었다. 바람 한 점 없는 땡볕의 사막이 시원한 바람이 불고 계곡물이 흐르고 꽃이 피는 숲이 되었다. 시시한 하루하루가 재밌고 신기하고 아름다워졌다. 센스 있고 웃긴 남자의 매력은 이렇게나 강력하다.


▲ 사진=차민경 기자 / 비 온 뒤 흐렸던 하늘이 맑게 개이는 쾌청한 느낌이랄까! (2019년 스페인)

#6.

L과 함께 각자의 남자친구, 남편에 대한 이야기를 꽃피웠던 지난 2박3일. 지금의 제주살이는 남편이랑 참 닮았다는 느낌이다. 거추장스럽고 불필요한 것들을 없애주고 나를 더 가볍고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인생 뭐 있나. 날 진짜 행복하게 해주는 거 한두개만 있으면 된다. 나머지는 군더더기다. 내 인생의 앙꼬 같은 우리 남편. 나다운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지치기해주는 제주살이. 아무래도 이번 생은 성공한 것 같다.

- 2021년 5월 2일, 제주여행 7일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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